
넷플릭스 시리즈 '이터너트(The Eternaut)'는 아르헨티나의 역사와 문화, 군사 독재의 상처를 담은 디스토피아 SF 드라마로, 전 세계적인 반향을 일으키며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강력한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한다. 2025년 5월 6일 화요일,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넷플릭스 시리즈 이터너트(The Eternaut) 광고판이 군사 독재 정권(1976~1983) 시절 강제 실종된 SF 만화 작가 헥토르 오에스터헬드(Héctor Oesterheld)와 그의 딸들의 포스터에 일부 가려져 있다.
넷플릭스 ‘이터너트(The Eternaut)’ 열풍
아르헨티나 디스토피아가 세계로 퍼지다
아르헨티나의 고전 SF 만화 '이터너트(The Eternaut)'를 원작으로 한 넷플릭스 드라마가 첫 시즌 공개 며칠 만에 전 세계 비영어권 TV 시리즈 부문 1위에 오르며 큰 반향을 일으켰다. 전력 공급이 끊기고 휴대전화가 먹통이 된 한 집에서 친구들이 카드 놀이를 하던 중, 갑자기 도시 전역에 치명적인 눈보라가 내리기 시작한다. 이 낯선 눈은 닿는 모든 생명을 죽음으로 몰아넣으며, 친구들은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한다. 다가올 미래에 대한 불안과 인간 본성에 대한 통찰이 담긴 이 스페인어 드라마는 총 6부작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넷플릭스는 내년에 시즌 2 촬영에 돌입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터너트’의 원작은 1957년 아르헨티나의 전설적인 만화 작가 헥토르 헤르만 오에스터헬드(Héctor Germán Oesterheld)가 집필한 그래픽 노블이다. 그러나 그의 삶은 군사 독재 시절 비극적으로 마감되었다. 1970년대 군부 독재 시절, 오에스터헬드와 그의 네 딸은 ‘행방불명’ 상태가 되었고, 그 비극적 역사는 여전히 아르헨티나 사회의 아픈 상처로 남아 있다. 넷플릭스 시리즈가 공개되면서 해외 출판사들은 원작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자, 미국 시애틀의 판타그래픽스 북스(Fantagraphics Books)가 절판된 영어판 재출간을 서두르고 있다.
'이터너트(The Eternaut)' 예고편.

'이터너트(The Eternaut)' 포스터.
원작자의 손자인 마르틴 오에스터헬드(Martín Oesterheld)는 이 시리즈가 단순한 SF를 넘어 아르헨티나 사회와 문화의 심오한 의미를 담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 작품이 전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키며 우리 가슴을 채우고 자부심을 불러일으킨다”고 전했다. 오에스터헬드는 할아버지의 유산을 존중하기 위해 이 드라마가 반드시 스페인어로, 아르헨티나 배우들이 출연하며 부에노스아이레스(Buenos Aires)를 배경으로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넷플릭스는 미국 시장이 이미 포화 상태에 이르자 중남미 등 새로운 시장으로 영역을 확장하고자 했다. 약 4년간의 제작 기간과 2,900여 명의 스태프가 투입된 이 작품에는 약 3,400만 달러가 아르헨티나 경제에 투입되었다. 시리즈는 익숙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거리 풍경과 건축물을 배경으로 외계인의 침공을 그리면서도, 현실과 판타지를 절묘하게 넘나드는 긴장감을 선사한다.
주인공들이 즐기는 ‘트루코(truco)’라는 아르헨티나 전통 카드 게임과 마테(mate)라는 국민 음료가 자연스럽게 등장하며 현지 정서를 살렸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는 지난 한 세기 동안 단 두 번만 눈이 내렸다는 점도, 극중 치명적인 눈과 맞물려 신비롭고 불길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과학소설 연구자인 마르틴 하디스(Martín Hadis)는 “‘이터너트’는 단순한 SF가 아니라 현대 신화”라며 “생과 사, 빛과 어둠, 친숙함과 낯섦이라는 대조를 통해 보편적인 공감을 얻었다”고 평가했다.

2025년 5월 13일 화요일,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이터너트의 원작자 헥토르 오에스터헬드의 손자 마르틴 오에스터헬드(Martín Oesterheld)가 인터뷰 도중 마테차를 마시고 있다.

2025년 4월 21일 월요일,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아이들이 고전 아르헨티나 SF 만화를 원작으로 한 넷플릭스 시리즈 이터너트의 홍보 벽화 옆에 모여 있다.
또한 시리즈는 1982년 영국과 벌인 말비나스(포클랜드) 전쟁을 주인공 후안 살보(Juan Salvo, 배우 리카르도 다린(Ricardo Darín) 분)의 배경으로 끌어들였다. 살보는 군사독재 시절 병사로 참전했으나 패배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인물이다. 이 전쟁으로 649명의 아르헨티나 병사가 목숨을 잃었으며, 이 비극은 지금도 국민의 마음에 깊은 상흔으로 남아 있다. 다린은 “말비나스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은 상처”라며 “이 이야기를 다시 꺼내는 것만으로도 많은 이들의 마음을 움직였다”고 밝혔다.
극한 상황 속에서 등장인물들은 서로에게 의지하며 살아남기 위한 기지를 발휘한다. 이들의 생존 방식은 아르헨티나에서 ‘아따도 꼰 알람브레(atado con alambre)’라는 표현으로 설명되는데, 이는 ‘철사로 임시로 묶어 놓았다’는 뜻으로, 어려운 상황에서도 가진 것을 최대한 활용하는 국민성을 의미한다. 마르틴 오에스터헬드는 “지금 아르헨티나는 극우 성향 하비에르 밀레이(Javier Milei) 대통령이 국가 예산을 대폭 삭감하고 문화 예산마저 줄이는 상황”이라며 “그럼에도 우리는 이 작품을 통해 아르헨티나 문화를 전 세계에 알리고 있다”고 말했다.
드라마 속 슬로건인 ‘아무도 혼자서 이겨낼 수 없다(No one gets through it alone)’는 최근 은퇴자들의 연금 삭감 반대 시위에서 피켓 문구로 등장하는 등 현실 정치와 맞물리며 새로운 의미를 획득했다. 다린은 “국가가 시민을 돌보지 않는 정책이 개인 자유와 연관되지만, 국가가 완전히 사라지면 시민은 난파선처럼 표류할 수밖에 없다”고 우려를 표했다.

2025년 5월 13일 화요일,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인권 운동가들이 군사 독재 정권(1976~1983) 시기 실종된 아이들, 특히 이터너트 원작자 헥토르 오에스터헬드의 손자손녀들을 찾기 위한 지속적인 노력을 촉구하며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다. 이들의 이야기는 넷플릭스 시리즈 이터너트에 영감을 주었다.

2025년 5월 13일 화요일,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헥토르 오에스터헬드가 집필한 SF 만화 '이터너트'의 영어판을 들어 보이는 그의 손자 마르틴 오에스터헬드.
시리즈가 인기를 끌자 부에노스아이레스 곳곳에는 원작자 오에스터헬드와 그의 가족을 찾는 실종자 전단이 붙기 시작했다. 1976년 군사 독재 정권이 집권했을 때, 당시 58세였던 오에스터헬드는 좌파 활동가로 알려져 있었고, 그의 네 딸은 극좌 게릴라 조직에 합류해 가족 모두가 군부의 표적이 되었다. 임신 중 납치된 딸들도 있었으며, 그들의 아이들은 ‘플라자 데 마요 광장 할머니들(Grandmothers of the Plaza de Mayo)’ 운동에 의해 지속적으로 찾아지고 있다.
이 할머니들은 이번 시리즈 덕분에 다시 한 번 실종 아동 찾기 캠페인을 벌이며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에 대해 캠페인 관계자 에스테반 에레라(Esteban Herrera)는 “넷플릭스라는 대중 플랫폼을 통해 더 많은 가정에 우리의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많은 시청자가 자신의 가족 실종과 관련한 의문을 갖고 당국의 입양 합법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마르틴 오에스터헬드는 “‘이터너트’는 살아 있는 기억이자 세대를 넘어 전해져 온 고전”이라며 “이처럼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는 것보다 더 강력한 사회적 메시지는 없다”고 강조했다. 이번 작품은 단순한 디스토피아 SF를 넘어 아르헨티나 사회의 역사, 문화, 그리고 현재 정치 상황을 반영한 의미 깊은 문화적 사건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터너트>는 넷플릭스에서 스트리밍으로 감상할 수 있으며, 한국어 자막도 제공된다. 보스턴에 거주하는 한인들도 스페인어 원어의 생생한 연기와 아르헨티나 특유의 정서를 자막과 함께 충분히 느낄 수 있어, 이 작품은 언어와 국경을 넘어 깊은 울림을 전한다.